정보화마을 - 청송 주왕산사과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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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왕산 기암 절경과 함께 조화를 이루고 있는 천년의 고찰 대전사

    웅장한 뜻 가슴에 새기고...

    청송군 부동면 상의리 200번지에 세워진 사찰입니다.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의상(義湘)이 창건하였다고 하나 건물의 양식으로 보아 조선중기를 넘지 못한 건물입니다. 사찰 경내에는 보광전, 명부전, 산령각 등이 있고 부속암자로 백련암, 주왕암이 있는데 보광전은 목조와가에 맛배지붕으로 다포집이며 정면3각입니다.

    일설에는 약 1000여년전 고려태`조 왕건 2년에 보조국사가 주왕의 아들 대전도군 입산 당시 창건한 사찰이라고 하며 창건할 당시에는 매우 웅장한 사찰이었으나 중년에 화재로 소실되어 버리고 입구의 비석과 부도만이 남아 있습니다.

    이여송 친필현판 동산문화재 제 2625호

    ▲이여송 친필현판

    대전사 건물로는 보광전(普光殿)과 명부전·산령각·요사채 등이 있고, 유물로는 보광전 앞 삼층석탑 2기와 사적비·부도 등이 남아 있습니다. 이 중 보광전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02호로 지정된 정면 3칸의 다포계 맞배지붕 건물이다. 내부에 임진왜란 당시 이여송(李如松)이 유정에게 보냈다는 친필 서신을 목판으로 음각한 것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보광전 앞의 석탑은 근처에 흩어져 있던 석탑재를 짜맞춘 것입니다.

    임진왜란시 이여송 장군이 당시 승병훈련을 시키고 있던 사명당에게 보낸 친필이 새겨진 목판이 대전사에 보관되어 있다. 크기는 가로 42.5cm 세로 24.5cm이고, 글 내용은

    대전사 동쪽 비탈진 계곡을 올라가면 안절이라는 별칭이 있는 주왕암이 있는데 이 암자는 대전사와 함께 창건되었다고 하며 주왕의 혼을 위안하기 위해 지은 것이라 합니다.. 문간채인 가학루는 중충 누각으로 되어 있고 기와는 이끼가 그윽히 끼어 오랜 풍상을 보여주며 16나한을 모신 법당 나한전이 있습니다.

    ←자하성 맞은 편 계곡을 건너 약 1,000m지점에 주왕암이 있다.

    대전사 건너편 옥같이 맑은 개울물과 병풍처럼 에워싼 사철나무에 감싸인 백련암은 대전사와 함께 지은 절로 주왕의 딸 백련의 이름을 따서 절 이름을 지었다. 이 암자에는 큰 종이 있어 새벽마다 산야에 은은한 종소리가 스몄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종은 없어지고 오직 그윽한 정서를 담고 있다.

    대전사 건너편에 위치한 백련암은 주왕의 딸 백련의
    이름을 따서 암호를 지었다.

    장군봉과 백련암

    천년이 넘은 고찰 대전사는 주왕산 전설과 함께 재미있는 설화가 내려오는 곳입니다. 그중 대전사의 경내에는 예전에 우물을 메운 흔적이 있고 지금까지 흔적이 남아 있는데요. 이 우물에는 신비로운 이야기가 얽혀 있다고 합니다. 한번 들어볼까요?

    조선시대 어느 스님이 부처님께 올리는 청수를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 냇가에서 길어다가 올렸습니다. 하루는 매일 물을 떠다 공양을 올리니 귀찮기 그지없어 스님들이 의논을 하게 되었습니다. 앞뜰에 우물을 파서 그 물을 길어 청수로 사용하자는 의견이 나왔지요. 그래서 스님들은 우물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후 이 절에 불이 나서 절이 모두 불타버렸습니다. 한참 후 성지도사가 와서 지세를 보고하는 말이 “대전사는 터가 부선형(浮船形) 즉 배가 바다에 떠서 항해하는 혈(穴)이라 여기에 우물을 파니 배바닥에 구멍이 뚫은 격이 돼지요. 그래서 불이 나서 절이 타게 된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스님들은 급히 우물을 메우게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대전사의 오른쪽 밭 가운데 우물을 메운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하네요.

    그러니 당시 대전사의 규모가 얼마나 웅대했었는지 상상할 수 있겠지요. 또 한가지의 전설에 의하면 그 우물에 노루 한 마리가 빠져 죽었는데 이는 살생이란 느낌으로 인하여 우물을 메우게 되었다고도 합니다.

    또한 일설에 의하면 이 우물을 마시던 스님들이 거의가 장수를 했고 힘이 지나치게 세어서 난폭한 행동을 자주 저질렀기 때문에 인근 주민들의 말성이 멀리까지 전파되어서 부득이 우물을 묻어 버렸다고도 합니다.